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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의 꿈

산토끼노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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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노래 소개

이일래 선생은 본교에 재직 중이던 1928년 낙엽이 수복히 쌓이던 가을에 조국과 함께 음악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린 장녀 명주양(당시1세)을 안고 학교 뒷산인 고장산기슭에 올라가 잔디밭에 누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생의 바로 앞에서 두려움도 없이 깡충깡충 뛰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도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가락을 흥얼거리다 집으로 돌아와 오선지에 곡을 만들어 적고 가사를 붙여 “산토끼”를 탄생시켰다.

이일래 선생님 조선동요 작곡집

'산토끼'노래는 일제의 압박속에 있는 국민의 심정을 토로한 억눌린 항일사상이 담겨있는 애국의 노래이며 동심을 가득 담은 맑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어 작곡 당시인 처음에는 이방초등학교 전교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이웃학교를 거쳐 전국으로 널리 퍼졌다. 멋모르는 어린이들은 노래가 좋아 불렀으며 나이든 어른들은 마음씨가 곱기만한 토끼로 비유되던 조국을 잃은 서러운 마음을 노래에 실었다. 특히 이 동요는 우리나라가 토끼형상이므로 민족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이유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선생은 노래를 만든 뒤 일제의 탄압으로 자신을 숨기고 작사ㆍ작곡가 미상으로 계속 남아 있다가 1938년도에 출판된 ‘조선동요 작곡집’의 영인본이 1975년도에 나오면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일래 선생님 조선동요

이선생의 회상기록 중에서는 일제 시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기 여사가 노래를 몇 곡 배운뒤 거창유치원 교사로 재직하며 음악회 때 부른 노래 한 곡이 말썽이 됐다. 공여사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 “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근화반도 그대 사랑 어디로 가느냐”라는 구절을 두고 반항적인 뜻을 들먹이며 일본순사가 공여사를 감옥데 가두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일본 순사들은 노래의 출처를 알아내고 노래를 만든 이선생이 있는 마산까지 와서 노랫말 중 “근화반도”란 무엇이냐고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이선생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근화’라는 술집 기생의 이름을 넣어 만든 노래라고 둘러대서 난을 면한 일이 있는데 근화의 참 뜻은 무궁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생전에 술회했었다. 이일래 선생의 산토끼노래는 당시에 만들었던 가사와 차이가 있다. 당시의 이선생이 작사한 노랫말은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깡충 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 가아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로 이것이 원본의 가사지만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편리한 현재의 노랫말로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고 이일래선생은 1903년 5월 10일생으로 경남 마산시 성호동 62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며 마산에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1920년도에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 중동학교에 진학해 졸업을 하게 된다. 이 선생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나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한 천도교 낙성식에 참석하게 됨으로서였다. 거기서 이 선생은 김영환 독주회를 보고 감동을 받고 난 뒤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김영환씨가 출강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해 김씨에게서 음악을 지도 받으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던 이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때 김씨에게서 2년간 배운 바이올린 솜씨로 YMCA에서 홍난파 선생이 퍼스트바이얼린을 연주하고 이일래 선생이 세컨드바이얼린을 , 김영환씨가 피아노를 맡아 트리오를 구성해 연주회를 갖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다시 창녕군 이방면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창신보통학교를 재직하면서 ‘고향’을 작곡한 이선생은 본교에 와서 '산토끼’와 ‘단풍’을 작곡한다. 1936년부터 40년까지 5년간은 마산 제비산에 있던 호주선교사의 어학교사로 재직했고, 1940년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서 본격적인 음악을 1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국 후 이선생은 마산여자 가정학원을 설립해 여성들의 개화운동에 참여하자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학원은 1943년도 폐쇄됐고 이선생은 이듬해에 만주로 넘어갔다. 만주에서 해방을 맞은 뒤 1947년도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으로 취임해 2년간 공직 생활을 한 후 퇴직, 일반서민의 생활로 돌아갔다.특히 이일래 선생은 마산의 호주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영어 실력이 뛰어나 해방 후 미 군정 당시 CIC 마산대장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51년 마산민선시장 선출 때는 청년활동 등 의욕적인 움직임으로 출마설까지 나돌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일래 선생의 음악생활은 연희전문학교의 김영환씨에게서 배운 바이올린을 시작으로 1926년부터 1945년 해방때까지 마산문창교회 성가대를 맡는 등 음악활동을 했다. 당시 문창교회에는 유명한 주기철 목사가 있었는데 주목사의 권유와 도움으로 성가대 지휘와 신앙심에도 열심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은 호주선교사 어학교사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 다닐 때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약 1백 여 곡의 노래가 따로 기록된 책자가 있었으나 6.25 당시 모두 분실 됐고 지금은 아쉽지만 조선동요 작곡집에 수록된 동요를 제외하곤 발표된 곡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1938년 1천부의 초판을 찍었으나 출판사에서 몽땅 다 가지고 가버려 다음해에 호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재판 1천부를 다시 찍었다. 이때 이선생은 마산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영어가사를 붙여 2백부는 자신이 가졌으며 7백 여부는 호주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내졌다. 조선동요 작곡집은 우리나라에서는 홍난파 동요집 다음으로 발행된 소중한 동요집이다.

이일래 선생은 1947년에 15년간의 교직생활을 떠나서 초대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맡게 됐으며 이후 임신영씨가 운영했던 중앙대 관사에 머물다 6.25를 만나 소장 중이던 동요집을 단 한권도 남기지 못하고 모두 분실하게 된다. 이선생은 시간이 지나간 뒤 책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을 하던 중 마산에 있던 친구가 책을 구해줘 1975년 영인본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마산의회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지고 그 해 7월 7일 오후 4시 서울 YMCA회관에서 한국동요동인회 주최로 복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동요집에는 ‘산토끼’. ‘봄노래’, ‘봄’, ‘해바라기’, ‘노고지리’, ‘엄마생각’, '아침’과 ‘시편23'등 주옥같은 동요와 성가21곡이 실려 있다. 이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좋아했으며 평생을 두고 음악을 떠난 1944년 이후에는 사회활동에 비해 음악활동을 소홀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선생의 성격은 인정이 많고 자상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곧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그의 제자들은 말한다. 이선생은 창녕의 이방보통학교 재직 시 산토끼를 만든 계기가 된 고장산을 자주 올라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혼자서 노을이 질 무렵이면 고장산에 올라가 잦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아마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 있는 나라의 상황에 대해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이선생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고장산에 올라가 산책을 하는 등 신학문을 공부해 개화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당시 제자들은 회상한다. 이일래 선생은 1975년을 전후해 첫딸 명주씨의 집인 서울에서 거주했으나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 202번지로 이사를 해 1979년 7월 10일 76세의 연세로 작고 하셨다.